한국의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 등재한국의 세계기록유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링크 프린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Archives of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2017)

한국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모든 대륙에서 식민지적 팽창을 하면서 대부분의 피식민지국가에게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우고 그것을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동원하였다. 아시아 동북쪽의 작은 나라였던 한국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외채로 망국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미 베트남, 인도, 폴란드, 이집트, 오키나와 등의 국가들도 외채로 나라를 잃은 역사적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 국민은 외채로 인한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의 남성은 술과 담배를 끊고, 여성은 반지와 비녀를 내어놓았고, 기생과 걸인, 심지어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내는 등 전 국민의 약 25%가 이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전국민적 기부운동을 통해 국가가 진 외채를 갚음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려 하였다.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 에도막부의 초청으로 12회에 걸쳐, 조선국에서 일본국으로 파견되었던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를 총칭하는 것이다. 이 자료는 역사적인 경위로 인해 한국과 일본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16세기 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국을 침략한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구축 및 유지에 크게 공헌했다.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은 외교기록, 여정기록, 문화교류의 기록 으로 구성된 종합자산이며, 조선통신사의 왕래로 두 나라의 국민은 증오와 오해를 풀고 상호이해를 넓혀, 외교뿐만이 아니라 학술, 예술, 산업,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활발한 교류의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비참한 전쟁을 경험한 양국이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하고 유지해 가는 방법과 지혜가 응축되어 있으며, 성신교린 을 공통의 교류 이념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이민족간의 교류가 구현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지역에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고, 안정적인 교역루트도 장기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은 금⦁은⦁옥에 아름다운 명칭을 새긴 어보, 오색 비단에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쓴 교명, 옥이나 대나무에 책봉하거나 아름다운 명칭을 수여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하는 내용을 새긴 금책 등이다. 이런 책보(冊寶)는 조선조 건국 초부터 근대까지 57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봉헌되었다. 1392년부터 1966년까지 570여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책보를 제작하여 봉헌한 사례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조선왕조의 왕위는 세습이었다. 국왕의 자리를 이을 아들이나 손자 등(또는 왕실의 승계자)은 국본(國本)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는 전례(典禮)를 거쳐야 했다. 어보와 어책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봉작(封爵) 전례의 예물로 제작했다. 이에는 통치자로서 알아야할 덕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들어있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그 징표로 국왕에게서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들이 성혼한 경우에는 이들의 빈(嬪)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왕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즉위식에서 왕비도 금보(金寶), 옥책(玉冊), 교명(敎命)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죽은 뒤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가 정해지면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살아서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이었다.
한국의 유교책판.+

한국의 유교책판

유교책판(儒敎冊版, Confucian Printing Woodblocks in Korea)’이라고 불리는 이 기록유산은 조선시대(1392~1910)에 718종의 서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총 64,226장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유교책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책을 통하여 후학(後學)이 선학(先學)의 사상을 탐구하고 전승하며 소통하는 ‘텍스트 커뮤니케이션(text communication)’의 원형이다. 수록 내용은 문학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철학, 대인관계 등 실로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음에도 궁극적으로는 유교의 인륜공동체(人倫共同體) 실현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KBS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한 비디오 녹화원본 테이프 463개와, 담당 프로듀서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직접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진행표, 큐시트, 기념음반, 사진 등 20,522건의 기록물을 총칭한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냉전체제가 지속되는 지역이다. 대한민국의 이산가족은 일제강점기(1910~1945)와 한국전쟁(1950.6.25.)으로 인한 남북분단으로 발생하여 약 1천만 명에 이른다. KBS는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7.27.) 30주년을 즈음하여 를 기획했다. 이 기록물은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냉전 상황과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혈육들이 재회하여 얼싸안고 울부짓는 장면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치유해 주었고, 남북이산가족 최초상봉(1985.9)의 촉매제 역할을 하며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했다. 또한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이 생겨나서는 안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했다. 이 기록물은 세계 방송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유산이다. 텔레비전을 활용한 세계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이다. 총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방송 전담인력 1,641명이 투입되고 138일간 방송되었다.
새마을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1970년~1979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개된 새마을운동에 관한 기록물들이다. 이 기록물은 대통령 연설문, 정부 문서, 마을 단위의 기록물, 편지, 새마을운동 교재, 관련 사진, 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마을운동’이란 문자 그대로 ‘New Community Movement’또는 ‘New Village Movement’를 뜻한다. 대한민국은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배와 6·25전쟁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달성한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이러한 점에서 많은 개발도상국에게 한국은 교훈적인 국가 모델로 알려져 있다. 새마을운동은 한국이 걸어온 이러한 놀라운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1970년부터 1979년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 농가의 평균 소득은 825달러에서 4,602달러로 껑충 뛰어올랐고 새마을운동은 빈곤퇴치의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영웅 중 한 사람인 이순신 장군이 일본의 조선 침략 당시였던 임진왜란(1592~1598) 때에 진중에서 쓴 친필일기이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에 한국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기록물은 시민의 항쟁 및 가해자들의 처벌과 보상에 관한 문서·사진·영상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1980년 5월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최측근 중 한 명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뒤 일어났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사망했을 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열망해 온 민주주의 시대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지휘권 부재를 틈타 다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상황에 격분한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전국적인 계엄령 확대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한 새로운 군사정부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이끄는 평화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공수특전단을 광주로 급파하였다.
일성록(日省錄)+

『일성록(日省錄)』

『일성록(日省錄)』은 근세 전제군주정의 왕들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 성찰하고 나중의 국정 운영에 참고할 목적으로 쓴 일기로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거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기록유산이다. 글자 그대로 ‘하루의 반성문’을 의미하는 『일성록』은 조선왕조(1392~1910)의 22대 왕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자신의 일상생활과 학문의 진전에 관해 성찰하며 쓴 일기에서 유래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 신하들로 하여금 일지를 쓰게 하고 내용에 대해 자신의 승인을 받게 함으로써, 『일성록』은 왕 개인의 일기에서 국사에 관한 공식 기록으로 바뀌었다. 그 편찬 작업은 단순한 국사의 기록이 아니라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동서양 간의 정치와 문화의 교류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세계적인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 때문에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의보감+

『동의보감(東醫寶鑑)』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는 말은 ‘동양 의학의 이론과 실제’를 뜻하며, 1613년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의학지식과 치료법에 관한 백과사전적 의서이다. 왕명에 따라 의학 전문가들과 문인들의 협력 아래 허준(許浚, 1546~1615)이 편찬하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의학 지식을 종합하였고, 일반 백성을 위한 혁신적인 공공 의료 사업을 수립하고 실행한 것이다. 의학적 측면에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에서 2,000년 동안 축적해 온 의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의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하나의 전집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현대 의학 이론에 비견되는 지식을 담은 이 책은 동아시아와 그 너머 세계의 의학 발전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의료 제도와 관련해서는 19세기까지 사실상 전례가 없는 개념이었던 ‘예방 의학’과 ‘국가에 의한 공공 의료’라는 이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동아시아의 의학 지식과 기술의 발달을 대변하며, 나아가 세계의 의학과 문화에 남긴 발자취이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의 의의와 중요성은 세계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조선왕조 『의궤(儀軌)+

조선왕조 『의궤(儀軌)』

고유한 기록유산인 『의궤(儀軌)』는 조선왕조(1392~1910) 500여 년간의 왕실 의례에 관한 기록물로, 왕실의 중요한 의식(儀式)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보여 주고 있다. 진귀한 『의궤』는 왕실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아주 자세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혼인·장례·.....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高麗大藏經板-諸經板)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은 고려 왕조가 제작한 ‘삼장(三藏, Tripitaka, 산크리스트어로 ’3개의 광주리‘를 의미, 불경)’으로, 근대 서구 학계에 흔히 ‘Tripitaka Koreana’라고 알려져 있다. 총 81,258판의 목판에 새긴 「고려대장경」은 13세기 고려 왕조(918~1392)의 후원을 받아 만들었으며, 현재 대한민국 남동쪽에 있는 해인사(海印寺)라는 고찰에 보관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은 이를 구성하는 목판의 판수 때문에 흔히 ‘팔만대장경’으로 불린다. ‘삼장’ 또는 한국어로 ‘대장경’은 불전(佛典), 즉 불교 경전 컬렉션을 뜻하며,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그대로 실은 경장(經藏, Sutta-pitaka), 승단의 계율을 실은 율장(律藏, Vinaya-pitaka), 고승과 불교 학자들이 남긴 ‘경(經)’에 대한 주석과 논(論)을 실은 논장(論藏, Abhidhamma-pitaka)으로 구성된다. 불교가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에 전해지고, 불경이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언어에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교육 담론의 공용어로 사용되어 왔던) 한문(漢文)으로 번역되었을 때, 여러 국가에서 불경을 배포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목판에 담으려고 시도했다. 그중 하나인 「고려대장경」은 아시아 본토에서 현전하는 유일하고 완전한 경전이다.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 왕조에 관한 방대한 규모(17~20세기 초)의 사실적 역사 기록과 국가 비밀을 담고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기록된 일기는 서구의 영향력이 당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 왕조의 문호를 어떻게 개방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국왕을 ....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고려 말에 백운화상(白雲和尙, 1299~1374)이 엮은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은 선(禪) 불교의 요체를 담고 있다. 여러 부처와 고승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누구라도 선법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심경(直指心經)』, 또는 『직지』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직지』는 1377년 7월 청주의 흥덕사(興德寺)라는 옛 절에서 가동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인쇄되었다. 승려였던 석찬(釋贊)과 달담(達湛)이 『직지』의 간행을 도왔고 묘덕(妙德)이라는 여승이 이에 필요한 재원을 시주하였다. 『직지』는 본래 상(上), 하(下) 2권으로 인쇄되었으나 상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의 옛 책에서는 좀 더 이른 시기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다른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 책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가동(可動) 금속활자본의 증거로서 인류의 인쇄 역사상 매우 중요한 기술적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해례본)』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판본에는 1443년에 창제된 한국의 문자 한글을 공표하는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의 반포문(頒布文)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정인지(鄭麟趾)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과 용례를 덧붙여 쓴 해설서 해례본(解例本)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판본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하며,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계적 중요성·독창성·대체 불가능성 훈민정음은 한국인에게 문자체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무엇보다 한자로는 쓸 수 없던 한국인의 말까지 완벽히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한자는 중국인을 위한 문자 체계이며, 음운 체계와 문법 구조가 한국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를 두고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한자로 한국말을 적는다는 것은 네모난 손잡이를 둥근 구멍 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 왕조를 건립한 태조(太祖, 1392~1398) 때부터 철종(哲宗, 1849~1863, 조선의 제25대 왕)의 통치기에 이르는 470여 년간의 왕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 《실록》은 역대 제왕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와 군사‧사회 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전통 예술‧공예‧종교 등 조선 왕조의 역사와 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매일의 기록이다. 후임 왕이 전왕의 실록의 편찬을 명하면 《실록》이 최종적으로 편찬되었다.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왕의 비서기관이 작성한 일기), 의정부등록 (議政府謄錄, 최고의결기관의 기록),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문무합의기구의 기록), 일성록(日省錄, 국왕의 동정과 국무에 관한 기록)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료는 사초와 시정기였다. 사초는 봉교(奉敎) 2인, 대교(待敎) 2인, 검열(檢閱) 4인으로 구성된 8명의 사관(史官)이 작성하였다. 이들 사관은 항상 모든 국무에 관한 회의에 입시하여, 왕과 관리가 논의하는 국무의 내용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사관들은 때때로 누가 선행을 하고 누가 악행을 저질렀는지 촌평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시정기는 춘추관(春秋館)에서 관리하였다. 사관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사초의 열람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록》의 내용을 누설한 사관은 중죄로 처벌을 받았다. 사료의 작성에 관한 규율과 규칙은 매우 엄격했다. 인쇄된 《실록》은 사고에서 엄격한 관리 하에 보관되었다. 다음과 같은 4개 본의 『조선왕조실록』 총 2,077 책이 보존되었는데, 이 모두가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