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결과
국채보상운동운동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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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으로 거듭난
최초의 국민운동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파급과 성과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인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쇠락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의 1년간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운동이 었으며, 우리 역사 5천년 사상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국채보상금 처리회(회장 유길준)는 각 도 대표자회의를 통해 "의연금으로 장차 교육사업을 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해 한강변의 좋은 농토를 사들이던 중 1910년 8월 29일 한 · 일 합방의 국치를 맞았고, 모집한 의연금은 그 후 한국 국민들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