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20세기 초 세계열강이 아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경제적 침탈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07년 한국에서 민간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금연·금주·감찬을 통한 외채 갚기 운동에 관한 기록물임. 이 기록물은 국가기관 및 정부기관 및 민간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과 참여 당사자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으며, 자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
특히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당시 민간들이 손으로 직접 쓴 수기록 자료와 그것을 언론에 보도한 신문자료와 합쳐 한 쌍을 이루고 있어 기록물의 역사적 실체를 스스로 보증하고 있음. 이는 각 지역에서 발표된 취지서가 며칠 안에 신문에 전재되었으며, 마을에서 모인 성금액과 기부자의 명단을 적은 성책이 신문사에 도착하면 그 내용을 그대로 게재하였기 때문임.
언론은 이러한 국민운동의 실상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온 국민의 공감을 불러와 전국적 확산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음. 당시 언론은 각 마을에서 일어난 애틋한 사연과 감동적인 사건들까지도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하였음. 동시에 본 운동이 전개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까지도 가감 없이 보도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민간이 중심이 된 외채 상환의 기록물로서도 세계사에 유일하지만 동시에 식민지국가의 탄압 속에서도 이를 가감 없이 보도한 언론보도의 기록물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음
세계적 중요성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동아시아 근대의 형성과정에서 발현된 국민적 책임의식, 평화 사상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물로서, 중요한 세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료임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는 침략의 수단으로 약소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식민지화를 추진하였고, 이에 대해 중국(1909∼1910), 멕시코(1938)등에서는 피침략국 국민의 일부가 외채 갚기 운동을 전개한 경우가 있지만,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국민이 비교적 장기간 전개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형태임
국채보상운동기록물에는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려는 데는 계층의 구분이 없음을 강조하는 국민적 책임의식이 빛나고 있으며, 이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어 21세기의 사회책임운동으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의 국민적 책임정신은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서는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었고, 이 운동은 제2 국채보상운동으로 불리고 있음.
이처럼 한국에서 발생한 외채 갚기 운동은 국민의 권리보다는 국민된 도리 또는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개되었으며 채무자의 책임과 함께 채권자의 책임 또한 예리하게 지적하였음. 따라서 제1, 제2 국채보상운동은 사회적 책임투자, 사회적 책임소비 등 경제주체의 사회적 책임운동으로 맥을 잇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채권자의 책임을 주장하고 있는 토빈세 등 투기자본규제 운동 및 부채탕감운동인 쥬빌리 2000운동, 개발도상국의 금융기술능력 지원을 선포한 2015년 UN의 SDG(지속가능개발목표)캠페인과 같은 새로운 경제사회질서운동과도 그 맥을 잇고 있음
또한 국채보상운동은 제국주의의 금융 침략에 대해 온 국민이 외채를 자발적으로 떠맡아 해결하려는 평화적 공존을 지향한 운동임. 국채보상운동은 금연, 절약, 나눔의 평화적 방식의 비폭력운동을 통해 국가 간 호혜적 평화적 공존을 달성하고자 하였음
국채보상운동이 지향한 평화의 의미는, 비슷한 시기의 인도에서 일어난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인 아힘사(비폭력)-스와데시(국산품애용)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지만 불매운동을 통한 소극적 의미의 비폭력을 넘어, 기부를 통한 성금으로 외채 그 자체를 갚아 침략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상호 호혜적 공존을 추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평화를 지향하고 있음
캉드쉬 전 IMF 총재는 1998년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금모으기 운동의 현장을 보고 한국 국민의 책임의식에 ‘존경’을 표했으며,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2012년 인터뷰에서 '금모으기 운동은 국가 위기 대응에 있어서 공동체 연대의식(solidarity)의 대표적 사례'라고 언급하였음
국채보상운동이 9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 했을 때 ‘금모으기 운동’으로 되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남미·미국·유럽 등지의 외환위기 때마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이 주목되는 것을 볼 때,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현재 세계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부채위기에 대한 해법을 논의할 때 지속적으로 소급되어 그 의미가 재해석될 수 있는 자료임
비교 기준
시간
국채보상운동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경영을 경쟁적으로 확장하던 시기에
발생하였음.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피식민지국가의 평화적 저항이 맞부딪치면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이 발발한 1907년경은 1905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일본의 차관으로 한국의 지하자원개발권 인수, 화폐개혁 추진, 일본 상인에 대한 저금리 대출 등으로 인해 한국의 민족자본이 위축 되는 등 극심한 경제위기에 직면하던 시기임
을사늑약(1905년)으로 인해 주권상실의 위기를 인식한 애국계몽운동 지식인층과 민족자본의 위기를 피부로 느낀 민족자본층이 경제적 궁핍으로 삶이 어려워진 일반 서민층과 연대하여 일어난 운동임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반적으로 피식민지국가에서 일어나는 무장투쟁운동과 구별됨. 금연, 금주, 소비절약, 귀금속, 장신구 기부 등의 전국민적 기부운동으로 전개된 점에서 식민지 침략에 대한 평화적 저항운동임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유사한 형태의 국채보상운동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경영이 끝나는 1945년까지 중국(1909년), 터기(1923년), 멕시코(1938년), 베트남(1945년)에서도 연이어 일어났음
1960년대 이후 자본 자유화(소위 신자유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로 인해 외환위기가 발생한 한국(1998년), 타이(1998년), 몽고(2017년 진행중)에서 국채보상운동과 정신적, 형식적으로 유사한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나 외채 상환을 조기에 극복하는데 큰 기여를 했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촉발된 그리스(2009년)를 위시한 동유럽국가들 외환위기에 대하여 여러 세계언론들은 한국의 금모으기운동으로부터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음
이처럼 세계경제에서 일반적 현상인 외채 발생과 외채 상환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35년간의 일본식민지와 3년간의 한국전쟁 속에서도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중함
장소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신문에 게재된 보상소만으로도 강원도 3개소, 경상도 15개소, 경기도 5개소, 충청도 11개소, 전라도 17개소,
황해도 8개소, 함경도 9개소, 평안도 15개소 등 전국으로 확산됨. 이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전체 국민의 약 20%∼25% 정도임
국채보상운동에는 전국의 대부분의 지역(318개 군)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됨. 참여한 인원이 약 4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가구당 참여로 계산하면 당시 총 가구수의 20%∼25%정도의 비율임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안에서만 일어난 운동이 아님.
- 첫째 : 미국(센프란시스코, 하와이), 러시아(블라디보스톡), 일본(동경)등에 거주하는 한국들에 의해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해외에 알려지게 되었고, 해외에서 모금한 배상금이 국채보상운동 수합소로 전달되었음
- 둘째 : 국채보상운동 중심인물인 이준 열사가 1907년 7월 네델란드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림
- 셋째 : 영국인이 발행인으로 있는 대한매일 신보와 「Korea Daily News」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일-영간 외교문제로 확대되었고, 1908년에는 영국인 베델과 영국 총영사관, 한국인 양기탁, 프랑스인 마르땡(Martin), 미국인 콜브란(Collbran) 그리고 일본의 재판관과 총독부 등 5개국이 관여된 국제적 재판으로 비화되었음. 이 재판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은 전 세계로 전파됨
- 넷째 : 1910년 중국 뤼순에서는 러시아가 주최가 되어 일본의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세계적인 재판이 열림. 이 재판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주창하는 ‘동양평화론’과 ‘국채보상운동’을 세계로 전파되는데 기여하였음.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세계적 주요 이슈로 등장한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거의 유사한 외채 상환운동이 제국주의 시기인 20세기 중반에도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터키 등에서 연이어 일어났고, 20세기 말 세계경제가 외환위기로 큰 충격을 받았을 때도 국채보상운동을 계승하는 ‘금모으기 운동’이 한국, 타이, 몽고 등지에서 일어났음. 21세기 초 금융위기에 처한 유럽도 이 운동으로부터 책임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여러 언론이 지적하고 있음
이런 일련의 외채 상환운동은 1907년에 일어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그런 점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외채 상환운동의 기원적 성격을 가짐
사람
국채보상운동을 초기에 발의한 사람은 애국계몽운동의 지식인층과 민족상권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상인층이었지만 풀뿌리 서민들의 참여로 인해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음
이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시민자치기구인 민회 혹은 지역공동체를 통해 기부운동에 앞장서기 시작함. 특히 당시는 아직 봉건적 신분제 경향이 남아있는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국채보상운동 발기문 혹은 취지문에서도 ‘나라 사랑에는 남녀노소, 귀천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어 명실상부한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음
언론 기록물에서는 국채보상운동에 어린아이와 학생의 참여도 무수히 많았으며, 걸인, 백정, 나무꾼, 채소장수 등의 감동적인 참여 기사가 수 없이 게재되었음. 그러므로 이 운동에는 기존의 권력 양반층 이외에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던 지식인, 상공인, 중소지주 그리고 그때까지 역사의 주변인이었던 가정부인, 기생 등의 여성, 또한 소작인, 소상인, 백정 등의 서민과 학생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초기적 시민운동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
언론 기록물은 여성참여를 매우 적극적으로 보도하였음. 여성 중에도 특히 기생, 과부의 참여가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이 남성중심의 금연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이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대구지역 여성이 ‘나라 사랑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단체를 결성하여 자신이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을 기부하는 등의 여성단체 기부운동을 시작하였음을 보도하고 있음. 이 여성단체 기부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쌀과 반찬을 아끼는 절약운동,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그 돈을 기부하는 운동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됨. 이 운동은 한국 최초의 전국적 여성운동이라고 할 만하고, 이는 미국의 최초 여성운동이 1908년에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비교할 때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할 수 있음. 미국 등 서구의 여성운동이 노동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주권운동이었지만 한국의 경우 시민적 책임을 먼저 앞세우고 있다는 점은 크게 차별됨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한국이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서구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방식
으로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면서 이른바 시민적 계층이 출현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여주는 기록물임
대상과 주제
시민적 책임정신
국채보상운동의 기본정신은 ‘국민된 도리’로 나라를 지키려는 민중의 책임정신임
이것은 당시가 신분제가 아직 남아있던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피지배계급이 외채 갚기 기부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짐
그러므로 20세기 초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1세기 세계시민사회가 지향하는 시민의 책임정신을 일찍이 실천한 역사적 증거임.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은 최근 UN 및 세계시민사회에서 벌이고 있는 다양한 사회 책임 캠페인에 중요한 역사적 전범이 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의 책임정신은 서구에서 일반화된 시민의 권리와는 구별됨.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지배계층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여 외채망국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리고 침략의 의도로 들어온 제국주의의 나쁜 외채에 대해서 일반 국민이 그것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지는 시민적 책임정신에 근거한 행동 규범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음
이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서구 근대의 출발을 규정한 「권리장전」 Bill of rights에 대응되는 아시아적 정신 즉 아시아의 시민적 「책임」 responsibility을 보여주는 최초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음
전 국민적 기부운동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적 방식은 기부운동이다. 귀족이 거금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이 담배를 끊고, 반지를 빼고, 반찬을 줄여 기부하는 전국민적 풀뿌리 기부운동임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적 기부운동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지역공동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함.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은 마을, 문중, 모임, 학교, 직장 등에 기반을 둔 기부 운동의 상세한 과정과 목록을 포함하고 있음
이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전 국민적 기부 운동의 전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역사적 자료임
형태와 양식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본 운동에 참여한 시민이 직접 기록한 기록물임. 한지에 한문 혹은 국한문 혼용체로 쓴 붓글씨의 발기문과 취지문, 회문, 통문 그리고 참여기부자의 명단을 기록한 성책 등은 당시의 전형적인 민중적 기록임
언론 기록물은 운동의 전과정을 상세히 보도한 것이므로, 언론 기록물과 시민의 수(手)기록물은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한 쌍의 기록물임
수기록 자료, 언론 자료, 통감부 자료 등은 원본 및 유리원판과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자료로도 제작되어 있어 검색시스템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음
사회적/정신적/공동체적 중요성
국채보상운동은 21세기 세계 경제가 직면한 외채와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금융질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외채를 국민이 갚는다는 측면에서 채무자의 책임을 다하는 운동임. 동시에 국채보상운동은 악성 외채를 제공한 채권자에 대한 책임까지도 제기하고 있음
국채보상운동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책임을 동시에 전제하고 그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물론이고 이후 발발한 다양한 형태의 금융위기 과정에서 전제되고 있는 채무자만의 책임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 최근 그리스 금융 위기 과정에서 사실상의 근본적인 해결 방식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쌍방책임론을 전제하지 않고는 다른 방식이 없다는 것을 전 세계가 동의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국채보상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현대적 의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음
1999년 10월 「대구라운드 세계대회」는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정신을 재조명하여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구축과 관련한 논의를 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은 바 있음
따라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1세기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구축 논의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서 끊임없이 소급되어 그 의미가 재해석되어야 할 중요한 근거 자료임
보조요건
희귀성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두 가지 측면에서 희귀성을 보이고 있음.
첫째, 국가가 진 악성 부채를 국민이 기부운동을 통해 갚는 국채보상운동은 세계역사 속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귀중한 운동임. 본 기록물은 그 운동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종결의 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음.
둘째,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1900년대 초임에도 불구하고,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언론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본 운동이 삽시간에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산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음
국채보상운동 언론캠페인은 한국 최초의 언론캠페인일 뿐만 아니라 악성 외채를 갚기 위해 공동체적 기부운동과 저널리즘이 결합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음
완전성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료의 완전성을 보이고 있음
첫째, 국가기관 및 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1992년부터 20여 년 간 수집한 기록물을 합쳐 국가적 수준에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집대성하였으므로 국내에 존재하는 자료는 대부분 모였을 것으로 판단됨.
둘째, 36년간의 식민지 기간과 3년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제작된 엄청난 양의 기록물이 상당부분 소실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비록 일부이지만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가 존재하는 전부인 것으로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