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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울이 이 운동에 빠질 순 없지!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3-01-03 / 조회수 : 517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대저 무엇을 빚이라고 합니까? 크게 사업을 하고 재산을 불려서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흥하게 할 만한 것이 눈앞에 있는데, 만약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이 자신에게 없으면 반드시 남에게 빌려서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진실로 마땅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것을 바른 길이라 여겨 그칠 줄 모르고 한 번 빌리고 두 번 빌리다보면 나라의 형세가 어떠한 상황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예전에 영국·프랑스가 애급(埃及, 이집트)에 돈을 빌려 줄 때 애초부터 이집트에 재앙을 주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빚을 얻은 이들의 일처리가 옳지 못하여 남의 나라 땅이 되었습니다. 대저 국민 된 자들이 만약 남은 돈을 내어 위로는 국가의 필요한 것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국민들의 부강(富强)을 이루게 한다면, 또한 무엇이 좋다고 우리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남에게 돈을 빌리려 하겠습니까? 지난번 우리정부가 발전에 성급하여 빌린 외채가 1,300만 원에 이릅니다. 그 마음에, “이것을 밑천삼아 국가의 대사업을 일으키겠다.”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 2천만 국민들이 가령 한 사람이 1원씩 낸다면 2,000만 원이 될 것이고, 만약 오십 전씩 낸다면 1천만 원이 될 것이니, 이렇게 하여 남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의연금을 내는 방법이, 원하는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한 번에 내겠다는 사람은 편한 대로 하는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고, 그 나머지는 곧 달이나 분기로 나누어 매번 510전 등 차이가 있더라도 마지막에는 나의 역량대로 내고 마친다면 어찌 묘하고도 쉬운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본인 등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진실로 여러 날이 되었는데, 지금 다행히 영남의 동래(東萊, 부산)와 대구(大邱) 등지의 여러 군자(君子)들이 단연보상(斷煙報償)의 논의를 내어서 발기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의연금(義捐金)을 내는 사람들이 날마다 이르니, 우리 백성들이 자기 집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강토를 보존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훌륭한 마음을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 이미 금연(禁煙)을 하였다고 말한다면 우리 땅에서 나는 담배조차도 오히려 경계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수만 리 떨어진 애급(埃及, 이집트)과 여송(呂宋, 필리핀) 등의 비싼 담배와 맛이 떨어지는 청연(淸烟, 중국담배)과 같은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또 의연금을 내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사정과 재력이 다르고 빈부 또한 격차가 심하니, 말에는 천 근()을 실을 수 있지만 개미는 좁쌀 한 알을 짊어질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같은 이치입니다.

예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수백만, 수십만 원을 내는 사람도 있고, 또한 놋숟가락 하나를 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놋숟가락이라고 하는 것이 수백만 원과 많고 적고 가볍고 무거운 것을 비교한다면 진실로 어떠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공()을 받들고 나라를 바로세우는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이에 저희들이 멀리 동래(東萊, 부산)와 대구(大邱) 등의 여러 분들과 함께 하나로 뭉쳐 이 회()를 조직하여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에 우리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 우리 국민들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라니, ! 나라가 망하면 국민도 망하니, 힘씁시다. 우리 동포들이여! 또 얼마의 때를 기다려 나라의 모든 빚을 갚은 뒤에, 세계 제일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담배 수천만 개비를 사서, 온 국민 남녀노소가 바람결에 담배 한번 피면서 우리의 맑은 흥을 풀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一. 본회(本會)는 일본에 대하여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 보상 방법은 일반 국민의 의연금(義捐金)을 모집함. 단 금액은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

. 본회(本會)에 의연금을 납부한 사람은 본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성명과 금액을 신문에 공고함.

. 본회와 목적이 같은 각 단체는 서로 연합하여 목적을 이룰 것을 힘써 도모함.

. 의연금은 모아서 위의 금액에 이르기까지 믿을 만한 우리나라의 은행에 맡겨둠. 다만 수합된 돈은 매월 말에 신문에 공고함.

      一. 본회는 목적을 달성한 뒤에 해산함.

 

     광무 11(1907) 222

     발기인

    김성희, 유문상, 이필상, 김주병, 오영근, 최병옥, 김상만, 임봉래, 안국선, 윤병승
    윤태영, 윤천구, 박태서, 송기윤, 현공렴, 김대희, 김동규, 이승교, 신해용, 최병진,
    한진용, 이상익, 주한영, 고유상

 

수전소(收錢所)는 아래와 같습니다.

중서(中署) 전동 121, 보성관(普成館) 안 야뢰보관(夜雷報館) 임시사무소.

중서(中署) 포병(布屛) 아래 광학서관(廣學書館) 김상만(金相萬).

남대문(南大門) 밖 도동(桃洞) 건재약국(乾材藥局) 유한모(劉漢謨).

서서(西署) 석정동(石井洞)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

남대문(南大門) 안 상동(尙洞) 청년학원사무소(靑年學院事務所).

남서(南署) 대광교(大廣橋) 374호서포 고유상(高裕相).

중서(中署) 파조교(罷朝橋) 건너편 중앙서포 주한영(朱翰榮).



우리 서울이 이 운동에 빠질 순 없지!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양력 1907222(음력 1907110) 서울의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 24인이 당시 일제가 대한제국에 강제로 부여한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하기 위한 목적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그 취지를 담아 전 국민에게 배포한 기록물입니다. 전회에서 소개한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가 일제의 강압적인 경제 식민화 정책에 맞서 나라의 빚을 갚아 국권을 수호하고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첫 불씨이자 기폭제가 된 작품이라면,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들고 일어난 여러 국채보상운동 단체 중 처음으로 공식적인 회칙을 제정하고 합법적 운동단체로서의 형식을 갖추어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전 국민이 체계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나가는데 있어 하나의 구심점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취지서가 나오게 된 배경과 기록물의 종류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자신들에게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강압적인 차관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게 하였고, 이 거액의 외채를 상환하는 것이 불가능한 처지에 이르자 마침내 1907221, 대구 서문시장 북후정에서 김광제(金光濟), 서상돈(徐相) 16인이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를 낭독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대구의 소식이 들려오자 가장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반응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중심 수도 서울이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의 심장으로 기능하던 수도로써 오랫동안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을 직접 체감하고 있던 서울의 지식계몽가들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발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그 다음날인 222, 이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배포한 것입니다. 수도 서울의 이러한 분위기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한 지역을 넘어 전국적, 국민적인 의거로 공인된 것을 뜻했고, 곧 전국 팔도 전체에 국채보상운동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취지서에는 국채보상운동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및 전 국민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위한 6개조의 운영세목과 7개처의 의연금 모금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7.7×39.0크기로 인쇄되어 통문의 형태로 경향 각지로 배부되었는데 특이하게 앞면에는 국한문, 뒷면에는 한글로 취지문이 2중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한문에 조예가 깊지 않은 하층민과 여성, 어린이들이 국채보상운동의 취지 및 의연방법을 우리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와 같은 언론기관들도 곧바로 이 취지서의 내용을 지면에 실어 전국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렸으며, 본 취지서가 가진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이때 신문에 기사화된 3건 또한 모두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신문사명

수록 일시

/

비 고

만세보(萬歲報)

1907225

14

 

황성신문(皇城新聞)

1907226

13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7227

31

발기인 명단은 수록하지 않음

 

기록물의 역사적 의미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총 세 가지 차원에서 국채보상운동사 연구에 있어 실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고 그 취지서가 발표되자 그동안 참여를 머뭇거리고 있던 각 지방에서도 이에 적극 호응하여 단연회의성회단연동맹회혈맹회 등 국채보상이란 이름을 붙인 수많은 보상소가 경향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후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점차 관료자본가지식인상인유림학교언론 기관각종 단체여성백정기생 등이 모두 참여하는 범국민적 구국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아직 국채보상운동을 지도하는 전국적인 기관이 없던 상황에서 이 취지서를 통해 언론기관이 자연스럽게 국채보상의연금 수금소의 역할을 맡고 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최초로 발표된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에는 국민들에게 나라의 빚을 갚을 것을 호소하는 취지문 만이 존재했을 뿐 국채보상의연금을 어느 장소로 수합하고 어떠한 기관이 이를 책임지고 관리하며, 이를 위해 어떠한 회칙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추진 방향을 설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최초로 6개조의 운영세목과 7개처의 의연금 모금소를 체계적으로 설정하고 특히 모집된 의연금의 수합처 중 하나로 석정동(石井洞)의 대한매일신보사를 배정함으로써 언론기관이 국채보상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어나가게 하였으며, 이후 각 지역에서 제작된 다양한 국채보상 취지서들 또한 이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의 전례를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는 전국의 국채보상운동 활동을 총괄하는 범국민적 조직기구의 발생을 촉진시켰습니다. 취지서 발표 이후 국채보상기성회의 활동에 대해 알게 된 전국의 덕망 있는 지역인사들이 임원으로 가입하면서 각 사회단체와 13도 대표가 회동하여 회명을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개칭, 새롭게 발기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이를 바탕으로 전국의 보상회를 지도 감독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대한매일신보사 내에서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설립되었고, 이 두 기관의 주도 아래 전국의 지도층과 민중이 결합되고 종래의 지역별 지도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물에 함의된 주요 특징과 향후 연구방향의 제시

기록물 발행처의 경우 본 취지서를 제작한 신해용오영근안국선윤병승현공렴김대희 등 국채보상기성회의 발기인 대부분이 당시 서울 박동에 위치하고 있던 편집소이자 출판사인 보성관(普成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이기도 한 보성전문학교 및 보성학원의 교재 출판을 위해 설립된 보성관은 당시 학교 교재뿐 아니라 신지식층을 겨냥한 애국계몽 서적들도 함께 출판하고 있었으며 각종 사회활동 및 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본 취지서에 명기된 국채보상의연금 수전소 목록에는 보성관 내 야뢰(夜雷)보관 임시사무소도 함께 선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보성관에서 발행하던 종합 잡지 야뢰는 지면 중 상당 부분을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내용들로 채우고 있고 잡지의 편집 및 발행인이 국채보상기성회 발기인인 오영근이며, 신해용 등 야뢰의 필자로 활동한 인물의 상당수도 앞서 말한 국채보상기성회의 발기인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보성관은 구한말 당시 서울지역 애국계몽서적 출판활동의 중요한 근거지 중 하나로 인식되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애국계몽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던 인물들 대부분이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호응하였다는 사실은 지금의 우리에게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엇보다 신편박물학, 신편동물학등을 역술하고 단방비요경험신편(單方秘要經驗新編)과 같은 책을 저술한 당대 대표 지식인 신해용, 그리고 월남망국사, 유년필독, 동국사략등을 저술한 현채의 아들로 역시 신편가정학등의 교과서를 포함한 수십여 권의 교육 서적을 발행했던 현공렴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국채보상기성회의 발기인이 되어 서울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는데, 현재 이들에 대한 연구가 서적 발행 및 번역 활동 쪽에만 치우쳐져 있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서울 국채보상기성회 및 그 발기인들의 국채보상운동 활동에 대한 연구가 자세히 진행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학예사/책임연구원 정우석